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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시간창고로 가는길

까미 이야기

작년 8월쯤인가. 아니, 이제 새해가 밝았으니 어느새 재작년 8월이 되었습니다.
담벼락 너머로 희미한 새소리가 새벽 내내 들려옵니다. 벌써 사흘째이고 더군다나 밤새 비바람이 거셌습니다.
날이 밝자 마자 담너머로 가보니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무언가 검은 물체가 휙하고 숨어버리는데...

수풀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검은 새끼 고양이.
'아! 새가 아니고 새끼 고양이였구나. '
낯을 가리고 두려움과 배고픔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안될 것 같아 우선, 박스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준뒤 우리 키티 먹이를 그릇에 담아두고 왔습니다.

 

 

 

 

어느날 저녁 나절, 담 뒤가 시끄러워 나가보니 시에서 잡초 제거반원들이 나와 요란한 잡초 제거하는 소리가 들려 바로 담 뒤로 뛰어나갔는데, 안보입니다.

 

잡초 제거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중지해 달라고 하고 간신히 수풀 속에서 새끼를 안고 집으로 왔는데, 어미가 안돌아오니 아무래도 이 놈도 거두어 키워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해서 임시로 낯선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지가 살던 곳이 보이는 담벼락 위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간이 식탁으로 지지대를 만들고 박스와 벽돌로 까미 집을 만듦.

 

 

 

 

 

낯을 익힌 뒤로는 내가 다가가면 고개를 내밉니다.

 

나름 아는 척도 하고, 사료를 주면 정말 잘 받아먹습니다. 먹성이 좋은 녀석. 아니면 그동안 많이 굶주렸거나.

 

 

 

 

 

 

 

 

 

 

 

 

 

 

 

 

하나는 물통, 하나는 사료통.

며칠간 아침, 저녁으로 먹이를 갖다주었더니 점차 낯을 익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키우고 있는 키티도 8년 전에 어느 길고양이가 우리 집에 출산한뒤 버려두고 도망간 걸 거두어 키운 어미 잃은 고양이인데...


 

 

 

 

 

발견했을때부터 온통 까매서 '까미'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헌데 집으로 데리고 온 며칠 후, 동물병원에 가서 예방접종을 하러 갔더니 숫놈이랍니다.
해서 이름을 '깜돌'이라고 정정해서 지어주었는데, 깜돌이라는 이름보다는 까미라는 이름에 반응을 해서 그냥 까미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제 데려다 키운지 1년하고도 5개월째에 접어들어 어느새 어른 고양이로 자랐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척박한 외부환경에 의한 충격을 겪었는지, 안고 집 밖으로 나서기라도 하면 기겁을 해서 데리고 온 이후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근감을 보이는 까미입니다.

 

 

 

 

 

 

 

 

 

 

 

 

 

 

 

 

 

 

 

 

 

 
사교성이 있는 까미와는 반대로 우리 가족 이외에는 심하게 낯을 가리는 '키티'입니다.

 

 

벌써 키운지 9년째에 접어들었군요.

 

사실 이민 오기 전부터 저는 애완견을 많이 키워 왔었지, 고양이는 이곳에 와서 처음 키워 보았습니다. 비록 자의가 아니었지만...

 

그만큼 개인적으로는 반려견과 가까운 사이이지, 고양이는 멀게만 느껴진 반려동물이었는데...

 

까미가 나타나자 경계태세에 돌입하는 키티

 

저는 말 못하는 동물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좀 남달라 스스로가 피곤함을 감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동물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게 한국에서건 이곳에서건 장소와 때를 가리질 않는 것 같습니다.

30여년 전인가? 케텔(아니면 하이텔?, 초창기 한국의 통신 매체)의 동물보호 단체 회원으로 있었을때, 지금도 뜨거운 논쟁거리인 보신탕 문제에 대해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반대론자입니다.


그때 제가 대강 이런 말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한때 개를 먹거리로 사용했었던 것은 오로지 먹거리가 부족할 때의 생명유지 수단의 한 방편이었죠. 그런데 그때의 그시절과는 달리, 지금 몸 보신용 먹거리로 삼는 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먹고 살만한 시절에 다른 대체제가 있음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그때 그 이유의 하나로써 인생의 오랜 '반려자'로서 살아왔으며, 사람을 반려자로써 인지하는 반려동물을 잔인한 도살이나 학대로 먹거리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논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그 밖에 여러가지 많은 내용들이 오고 갔지만, 너무 오래 되어 기억도 가물 가물합니다.) 실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유난히 강한 동물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동물들을 반려동물이라 정의했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때 그 이후로 그전엔 없었던 '반려동물', '반려견'이란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던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태초에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지,
잔인하게 학살을 하거나 생명을 경시하는 일을 하라고는 하지 않으셨던가.

 

가끔 접하게 되는 국내외의 동물 학대자들 소식을 접하게 되면, 일단 마음이 많이 안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동물 학대자에 대한 처벌이 비교적 무거운데, 가장 큰 이유가 그런 행위자들이 사람에게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데 있습니다. 예방범죄의 차원에서도 이러한 점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심각한 문제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