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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文房四友

만년필에 대한 斷想 - "오로라 마레(바다)"



펜 한 자루가 주는 행복감은 의외로 대단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필통이나 포켓에 즐겨쓰는 펜들과 수첩을 가지고 간다면, 일단 마음이 든든하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이는 나이가 많고 적음이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연필이건 만년필이건, 볼펜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맘에 드는 필기구와 손글씨에 의한 '필 맛'을 알게 해주는 도구가 항상 내 곁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컴퓨터 자판을 손글씨보다 더 애용하는 요즈음의 세태에 비추어 본다면 말입니다.

그래서인가? 얼마전에 타블로라는 가수가 자신의 SNS에서 손글씨를 공모하면서 ‘정서가 있고 사연이 있는 손글씨를 의미있게 생각한다.’
라고 했던 그의 말은 그래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볼만합니다.

소설가 김훈도 자신의 연필로 채워지는 원고지에 의해 비로소 글을 써나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하는 내용을 언젠가 방송에서 접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실제로 손으로 필기를 하면 기억력과 이해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연구결과로써 입증한 워싱턴대학교 교육심리학과팀의 연구결과는 그래서 필기구를 가지고 손글씨를 즐겨 쓰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Aurora Mare f nib, aurora blue, Rotring Artpen ef, iro shizuku fuyu-gaki, C. D. Notebook, 강신주의 <감정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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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비슷한 연구결과가 프랑스 국립연구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도 나온 바 있으니, 결코 지나가는 소리는 아닌듯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한국에서는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와 노트의 판매량이 증가세로 돌아섰고, 필사와 캘리크래피도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와 같은 내용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듯 싶습니다. 때문에 필기구와 손글씨를 즐겨하는 제게는 반가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않아도 얼마전 기사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손글씨가 너무나도 형편없기에 그들만의 고민으로 자리잡은지 이미 오래라는 사실을 접해보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이번에 저의 만년필 단상은 오로라 마레(바다)입니다. 언젠가는 내 아이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만년필들이기에, 아빠의 만년필 사랑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 만년필들의 특성과 함께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있답니다.

이탈리아의 명품 만년필 브랜드인 오로라에서 전세계적으로 7500자루만 한정 생산된 나의 오로라 마레는 4622번째로 생산된 고유 넘버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 실 사용 만년필만을 고집하는 내가 어떻게 한정판 만년필을 갖게 되었을까요.

수십여 자루의 내 만년필들은 다 나름대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데, 제 오로라 마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여년 전, 만년필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던 동호회원 한 분이 갑작스레 결정한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오로라 마레를 제 단골 가게에 내 놓은 것을 마침 오로라 옵티마를 사려던 제가 데려 온 것입니다.

이건 좀 특별한 경험인데 가지고 있는 만년필들 중, 처음으로 소장하게 된 한정판 만년필인데다가 제가 원 주인이 아닌 두번째 주인으로써 맞이한 단 한 자루의 만년필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사연들로 인해 이 오로라 마레는 좀 각별한 정이 깃든 만년필입니다. (입양한 첫 만년필인데다가 원 주인의 아픈 사연이 있기에)
첫 인상은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사각사각하는 필감에다가 별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도 같은 만년필이었으니... (원 주인이 겨우 두번 잉크를 채웠었답니다. 게다가 제조사가 있는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박스와 함께 한 제품이기에)

하지만...........
앞서 오로라 마레를 써 보았던 경험자들의 경험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꾸준히 7~8개월을 써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정말 감칠 맛나는 필감. 버터 위에 쫀득쫀득하게 마냥 부드럽게 써지는 펠리칸 M800이나 워터맨 까렌, 오마스 파라곤과는 또 다른 차원의 필감입니다. 마찰력이 적당히 느껴지는 가운데 스쳐 지나가는듯이 써지는 빙판에서의 매끄러운 스케이팅... 딱 그런 필감입니다.


(Aurora Mare f nib, aurora blue, Rotring Artpen ef, iro shizuku fuyu-gaki, C. D. Notebook, 강신주의 <감정수업>)

사실 부드러운 필감의 만년필과 매우 좋은 재질의 노트와의 만남은 제 경험에 비춰보면 그리 썩 좋기만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까렌과 Premium CD notebook같이 좋은 재질의 노트는 만년필의 '닙'을 컨트롤하기가 좀 불편한데, 오로라 마레와 같은 필감은 종이의 재질을 불문하고 쓰는 사람의 필기체를 정말 아름답게 구현해줍니다. (이건 직접 경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박또박 정자체로 필기하지않고, 나같이 휘갈겨 쓰는 필체를 가진 사람들)

캡을 꽂아 썼을때의 밸런스와 무게 중심, 그리고 그립감과 함께, 찰지고 풍성한 잉크 흐름 또한 매우 좋습니다. 만년필을 한꺼번에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효용가치가 없을 지라도 이 오로라 마레, 단 한 자루의 만년필만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히든 리저브 기능' - 잉크가 다 떨어졌을때 뒤쪽의 노즐을 돌려주면 예비로 쓸 수 있는 잉크를 자체적으로 마지막까지 짜내어 비상시에 A4 용지 2/3~ 한 장 정도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능 - 도 상당히 유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공 제작된 18K 금촉, 대용량의 피스톤 필러 잉크 충전 방식, 고급스런 코발트 블루 색상의 오로로이드 수지 재질과 고풍스런 문양과 함께, 오로라 창업 당시의 로고 서명 인그레이빙 등은 명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필감, 메커니즘, 그립감, 무게감, 사용의 편이성 등 모두 만점을 줄만한 명품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펜 한 자루가 주는 행복감이 의외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평생을 이와 같은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늘 감사하기만 합니다. 이런 작은 기쁨을 내 아들, 딸도 후에 꼭 만끽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