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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생산적 책읽기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성자필쇠(盛者必衰)에도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한번 성(盛)한 자(者)는 반드시 쇠(衰)하게 마련이라는 성자필쇠(盛者必衰)라는 말이 있습니다.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별들도,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장미도 때가 되면 사라지거나 시듭니다. 과거 전세계를 상대로 맹위를 떨쳤던 그 많은 나라들과 영웅들은 이제는 역사 속에 묻혀 사람들이 그들의 옛 명성을 들추어내기 전에는 세상 밖으로 외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때나마 융성했던 나라들의 이면에는 반드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영웅들이 존재했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했고 주변국들을 공포에 떨게했던 알렉산더 대왕과 팍스 로마나의 원천이 되었던 불세출의 영웅 카이사르, 그리고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몽골제국의 칭기스 칸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다른 영웅들에 비해 오늘날 힘을 잃어 변방의 약소국으로 전락한 몽골의 칭기스 칸은 그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듯 싶습니다. 아니 오히려 볼테르는 자신의 희곡 <중국의 고아>에서 칭기스 칸을 일컬어 "오만하게, 왕들의 목을 짓밟은, 파괴적인 압제자"로 묘사했습니다.
반면 네루는 <세계사편력>에서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도 칭기스 칸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며 그를 '아시아의 영웅'으로 치켜 세운 바 있습니다. 이렇듯 동서양은 제각기 자신의 잣대에 의해서만 칭기스 칸을 비춰 볼 뿐입니다.

이 책은 잭 웨더포드라는 문화인류학자에 의해 15년간 몽골 땅을 직접 현지답사하며 불행했던 몽골 초원의 한 사나이가 어떻게 대 몽골제국을 이끌고 10만이라는 소병력으로 유럽을 오랜 잠에서 흔들어 깨웠으며,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근대세계 체제를 형성했는지, 그 진실을 재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겨우 25년이라는 그의 짧은 치세 동안 로마군이 400 여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도 더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으며, 이는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에 의해 정복된 땅이 무려 30개국에 이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그들에 의해 주도되어졌던 14세기가 팍스 몽골리카라고 대변되어져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소년의 이야기는 1162년 봄 유라시아의 광대한 내륙 지방의 가장 외딴 지역에서 시작되어 권력을 잡기까지를 지나서, 2부에서는 인생의 절정기인 48세(1211년)에 시작되어 그의 자식들과 손자들에 의해 진행된 50년간에 걸친 몽골 세계대전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진입한 과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평화의 세기를 살피면서, 서구 근대 사회의 정치, 상업, 군사 제도를 통틀어 몽골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무진, 즉 징기스 칸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기에 아무도 꿈꾸지 못한 일들을 이루어냈을까요? 우선 자라온 험난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자기절제와 스스로 정한 원칙에 충실한 그에게서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함께,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수하가 되게 만드는 매력적인 리더십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이라도 능력에 의한 발탁을 우선시하고 냉철한 판단력에 의한 집중력과 한번 정해진 목표는 결단코 실행하고야 마는 추진력과 함께,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적에 대한 단호한 응징 등은 그를 변방의 몽골 제국이 세계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해줍니다.

생각해 보면 카이사르의 로마와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은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 첫째가 바로 정복한 지역에 대한 융통성있는 동화 정책입니다.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온 만큼 자신들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관용 정책과 가장 효과가 좋은 길을 찾아 그것들을 결합함으로써 보편적 문화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스스로가 동화해 나갔습니다.

 
둘째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정한 전리품의 분배와 부하들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과 함께, 셋째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 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하여 능력주의에 입각한 인사 정책을 실현하였고, 마지막으로 뛰어난 기동력과 주변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적응력과 재창조력 등, 노마디즘으로 무장되었다는 점입니다. 두 나라 모두가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을 때 멸망의 길을 자초한 것을 보면, 성자필쇠라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책은 그동안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칭기스 칸이라는 매력적인 영웅에 대해 제대로 고찰하고 그들에 의해 파괴와 정복을 당해 부정적인 시각에 의해 매도되었거나 가려진 부분들에 대해서 오히려 다양한 문화교류와 교역 확대, 생활수준 개선이라는 혜택에 힘입어 잠들어 있었던 유럽을 깨운 몽골 제국에 대한 재평가에 힘을 실어 준 책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팽배해 있는 서구중심주의 사상에 일침을 가하게 될 또 하나의 좋은 교양서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서양인 문화인류학자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점이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