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자판의 입력 속도가 필기의 속도를 추월하던 날부터 공부를 하기 위한 용도 이외에는 좀처럼 필기구를 가지고 글을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즈음에, 그래도 아날로그의 향수를 물씬 풍겨주는 만년필과 깎아서 쓰는 연필의 필 맛은 생각만으로도 정감이 갑니다.
십 수년 전에, 아끼던 만년필을 눈독을 들이며 달라고 보채던 후배 사원에게 물려주고, 그 대체품으로 구입하려고 마음 먹었었던 만년필이 워터맨 까렌과 쉐퍼사의 발로아란 제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써온 프랑스의 워터맨을 신뢰했었습니다만, 그때에는 워터맨 까렌 흑색 만년필은 품절되어 매장엔 없었기에, 그러한 연유로 대신 나온지 얼마 안된 신제품 쉐퍼사의 발로아를 구입했었습니다.
미국 제품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디자인하고 만든 제품이어서인지 첫 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독특한 닙의 형태와 태생이 보석상이라 아름다운 외관이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었습니다. 무게 중심은 캡을 꽂아써도 좋고 빼서 써도 좋습니다.
캡과 배럴의 결합도 좋고, 닙을 제외한 부분은 너무나 평범해 보이지만, 캡의 클립이 이를 완전히 반전 시켜 줍니다. 그만큼 현대적 감각의 모던함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무로 된 케이스가 섣불리 볼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지고 중후해서 버리기엔 아깝고 두고 두고 써볼만 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쉐퍼의 주력 제품으로서 쉐퍼사에서 야심작으로 내어 놓은 제품인 만큼, 예전엔 이 모델을 바탕으로 최고가인 한정판‘이집트의 별(Stars of Egypt)’을 비롯해서 다양한 라인업을 구성하여 시장에 판매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당시 구입한 신제품 발로아는 촉의 재질에 따라 골드와 파라디움의 플래티늄이 있었는데, 까만 바탕에 골드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골드로 구입했었습니다. 공격적인 형태의 닙과 어우러져 전체적인 외관이 힘과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잉크를 넣고 시필하면 종이 위에 글씨가 날아다닐 정도로 필감이 좋으며, F nib 인데도 일본산 ef nib에 가까운 세필 만년필입니다.
보통 만년필을 처음 구입하면 두 가지의 종류로 나뉩니다. 쓰면 쓸수록 진가가 나타나는 만년필은 야생마처럼 며칠, 혹은 몇 달간 길을 들인 후, 주인의 필체를 제대로 구현해 주는 것이 있다면, 처음부터 순한 양처럼 길이 들여진 것이 있습니다. 쉐퍼 발로아는 그 공격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외양과는 달리 시필하자마자,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는 것이 신통합니다.
쉐퍼 발로아의 설명서에 언급되었듯이 프리미엄급으로서 잉크의 흐름이 좋고 크기에 비해 가볍습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좋은 제품입니다. 경쟁자이자 동급 제품인 워터맨 까렌은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반해 발로아는 이제 단종되었습니다. 그게 아쉬워서 흔적을 찾기위해 발로아의 오래된 조상(?)인 쉐퍼 Imperial 330을 new old stock 제품으로 구입하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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